우리 집을 누린다..집돌이·집순이의 진화 '홈족'

chefhome
조회수 117

우리 집을 누린다..집돌이·집순이의 진화 '홈족'

장회정 기자 

[경향신문] 오래 입어 늘어난 티셔츠에 고무줄 바지 차림으로 집에서 TV를 보거나 스마트폰을 만지며 혼자 술을 마시는 모습이 어딘가 외롭고 궁색해 보인다면, 당신은 트렌드에 뒤진 사람이다. 국가 행복지수 1위(2018년 유엔 ‘세계 행복 보고서’) 핀란드에서는 이런 휴식을 일컫는 ‘팬츠드렁크’를 권장한다. 핀란드의 저널리스트 미스카 란타넨이 쓴 <팬츠드렁크>에 따르면 이는 “자기답게 쉴 수 있는 완전한 휴식 방법”이자 “일상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홈족(Home族), 홈루덴스(Home+Ludens) 등의 신조어가 등장했다. 멀리 나가지 않고 주로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을 부르는 말이다. 과거 ‘집돌이·집순이’가 사회성이 결여된 아웃사이더 이미지가 도드라졌다면, 홈족은 ‘자발적으로 집에 머무는 것을 즐기는 사람’에 방점이 찍힌다.

두문불출의 아이콘으로 통하던 ‘집돌이·집순이’가 대세가 됐다. ‘홈족’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는 홈파티, 홈트레이닝 등 집에서 웬만한 것을 해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집을 구하는 것 자체가 도전인 그들에게 집은 ‘투자의 대상’이 아닌 위로를 받고 온전한 휴식을 누리는 공간이다. 로얄코펜하겐·‘디렉토리’ 매거진 제공

두문불출의 아이콘으로 통하던 ‘집돌이·집순이’가 대세가 됐다. ‘홈족’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는 홈파티, 홈트레이닝 등 집에서 웬만한 것을 해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집을 구하는 것 자체가 도전인 그들에게 집은 ‘투자의 대상’이 아닌 위로를 받고 온전한 휴식을 누리는 공간이다. 로얄코펜하겐·‘디렉토리’ 매거진 제공

■ 대세는 홈코노미

아침에 일어나 직접 커피를 내려 마신 뒤 친구들을 초대해 집에서 모임을 갖고 유튜브를 보면서 운동을 한 다음 욕조에서 휴식을 취하는 직장인 김주현씨(34)의 하루는 홈카페, 홈스토랑(홈+레스토랑), 홈파티, 홈트(홈+트레이닝), 홈스파 등의 유행 키워드로 압축할 수 있다. 지난해 11월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성인남녀 162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5명 중 3명이 스스로를 집에서 여가를 즐기는 ‘홈족’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유로는 ‘집에서 쉬는 게 진정한 휴식 같아서’라는 답변이 61%로 가장 많았다. 집에서 주로 하는 활동으로는 영화·드라마 정주행, TV시청, 휴식, 커피 만들기·마시기, 인터넷 쇼핑, 독서 순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75%가 향후 홈족이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두문불출의 아이콘으로 통하던 ‘집돌이·집순이’가 대세 트렌드가 되며 소비 시장에서도 큰손이 됐다. 단순히 주거공간을 넘어 집 안에서 여러 경제활동이 이뤄진다는 의미의 신조어 홈코노미(Home+Economy)도 등판했다.

신한카드 빅데이터연구소가 집 관련 키워드 언급량 변화 분석을 보면, ‘홈트레이닝’은 2017년 대비 2018년에 무려 213% 늘었다. 그 외 홈캉스(160%), 홈카페(53%), 홈요가(43%), 홈쿡(19%), 홈술·홈바(13%), 홈베이킹(12%), 홈스쿨(7%) 순으로 증가했다. 올 초 닐슨코리아가 발간한 ‘국내가구 주류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3개월 술을 마신 응답자 중 57%가 술 마시는 장소로 집을 꼽았다. 레스토랑 부럽지 않은 가정식의 시대를 연 간편식 시장은 약 3조원 규모로 커졌다. 신한카드 이용자를 대상으로 한 가정 간편식 이용자 연평균 성장률(2016~2018년)은 115%로 특히 30~40대에서 두드러졌다. 손질된 재료를 조리법과 함께 고객에게 배달해주는 밀키트는 가정 간편식의 효자 상품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밀레니얼 세대의 사회 진출과 맞벌이 부부의 증가로 밀키트의 수요가 점차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홈족들은 요리 솜씨는 전문가에게 외주를 맡기고, 집에서는 근사하게 차려내는 것에 힘을 준다. 덕분에 그릇에 대한 관심도 늘었다. 한국로얄코펜하겐 관계자는 “한 끼 식사도 가능한 한 멋지게 차려서 즐기고 싶어 하는 고객들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한번 사면 두고두고 쓰는 ‘16피스’ 4인용 식기세트 구비는 옛말이 됐다. 핀란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이딸라는 취향이 확실한 홈족을 위한 1~2인 식기세트를 출시했다.

■ 아웃소싱 시대에서 홈소싱 시대로

사회성 결여된 ‘아웃사이더’ 아니라 자발적으로 집에 머무는 것을 즐겨

‘밀키트’로 전문가 요리 솜씨 외주하고 1~2인용 식기세트로 근사한 상차림 트레이닝·뷰티 등 밖에서 하던 일도 집에서 해결하는 ‘홈소싱’ 수요 성장

집 마련 자체가 도전인 밀레니얼 세대 투자 대상 아닌 ‘누리는 공간’으로 집의 위상과 의미 재정립하고 있어

KEB하나은행 산하 하나금융경영연구소가 지난달 공개한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에 따른 유망 여가·생활서비스 분석’ 보고서는 수도권과 대도시 지역 30~40대 근로자를 중심으로 홈트레이닝과 홈뷰티케어, 웹툰·웹소설, 온라인 간편 신선식품 구매와 배송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신한카드 빅데이터연구소는 이 같은 흐름을 ‘집 안 소비의 다양화(투 홈 소싱)’로 명명했다. 이른바 ‘홈소싱족’은 과거 밖에서 해야만 했던 일(아웃소싱)을 집에서 해결한다. 가정 방문 트레이너가 있어 피트니스센터를 찾을 필요가 없고, LED마스크 같은 용품 덕분에 값비싼 에스테틱이나 스파시설도 마다할 수 있게 됐다. 욕실의 가치가 높아지며 관련 용품의 수요도 증가했다. 2018년 상반기 기준 오픈마켓 옥션에 따르면 대형 사이즈 욕조부터 소품에 이르기까지 욕실 인테리어용품 판매량이 상승했다. 전신욕조는 15배(1450%), 공간 활용도가 높아 작은 욕실에도 들일 수 있는 미니욕조는 164% 늘었다. 대림 디움은 책꽂이처럼 디자인된 파티션을 도입해 욕조에서 반신욕을 하며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대림 디움 관계자는 “욕실이 힐링 공간으로 주목받으며 리모델링 상담 시 샤워부스보다 욕조 시공을 문의하는 고객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신한카드 빅데이터사업본부 남궁설 셀장은 “주 52시간 근무, 미세먼지 등 집 안 체류시간을 늘릴 수 있는 환경들이 계속 형성되면서 다양한 소비 활동 공간으로서 집의 역할이 확장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 내 공간에 대한 애착 강화

지난 2월 초 뉴욕타임스는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에 돈을 쓰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좋은 침대를 구입하는 것은 호화유람선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지루할 수 있지만, 그 혜택은 보다 명확하다”고 했다. 매일 8시간을 침대에서 보내기 때문이다. 새로운 물건을 살 때는 ‘시간당 가격(가치)’을 고려하라는 것이 포인트다. 집에 투자하는 것이 남는 장사라는 것을 간파한 ‘홈소싱족’ 트렌드는 내 공간에 대한 애착 강화로 이어졌다. 업계에서는 “GDP가 3만달러에 이르면 자신을 둘러싼 공간에 관심을 갖는다”는 말이 통용되지만 지금의 양상은 조금 결이 다르다. 나건 홍익대 국제디자인전문대학원 디자인학 교수는 “자신이 머무는 공간을 보다 좋게, 더욱 편하게 만드는 것이 세계적인 이슈가 됐다”며 이는 “혼자서 집에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가 갖춰진 덕분”이라고 분석했다.

1·2인 가구가 증가하며 다양한 연령대의 소비자가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게 된 것도 집 안 꾸미기에 대한 인식을 바꿨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일상을 공유하면서 그 배경이 되는 집에 공들이게 된 것도 한몫했다. 인테리어 정보공유 플랫폼의 득세나 ‘집스타그램’ 등의 관련 해시태그 범람이 그 증거다. 덕분에 인테리어 전문 업체뿐만 아니라 관련 용품을 취급하는 라이프스타일숍도 부쩍 늘었다. 나 교수는 “옷, 차량 등 소장품에 대한 관심이 이제는 그것들을 다 정리해놓은 공간에 대한 심리적·감성적 욕구로 확장되며 그 공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증가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앞으로는 단순히 인테리어컨설팅을 넘어서 각각의 공간을 이용자 개개인에 맞도록 커스터마이징하는 맞춤 컨설팅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 집에 대한 오래되고 새로운 정의

온라인리서치기업 마크로밀엠브레인의 2015년 설문조사에서 집의 심리적 의미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82%가 “집에 가만히 있을 때 가장 마음이 편하다”고 답했다. 그중 60%는 “사회적 불안이 커지면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 같다”고 했다.

프랑스의 언론인 출신 에세이 작가 모나 숄레는 <지금 살고 싶은 집에서 살고 있나요?>에서 ‘좋은 집’에 대해 묻는다. 자칭 ‘집콕족’인 숄레는 “요즘처럼 가혹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시대에는 그 반대로 우리의 삶을 이루는 구체적인 조건들에서 다시 시작하는 게 의미 있지 않”겠느냐는 화두를 던지며 “중요하지 않은 일이나 해결해야 하는 곳, 또는 사람을 둔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덫쯤으로 전락”한 집의 위상을 재정립하고자 한다. “게으름 피우고, 잠자고, 공상에 잠기고, 읽고, 곰곰 생각하고, 혼자 고독을 즐기거나 지인과 어울리고,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 등등” 하찮게 여겼던 집 안에서의 행위가 “삶의 필수적인 에너지를 공급해준다”는 말은 뻔하지만 울림이 있다.

“모든 산업이 가정적인 행복을 파는 데 급급”한 나머지 “우리는 집을 ‘소비할 권리’밖에는 없다”는 슐레의 지적에 응답이라도 하듯, 집을 ‘누릴 권리’를 찾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은 매체가 지난 1월 등장했다. 모바일부동산플랫폼 직방과 ‘볼드저널’이 협업해 만드는 계간 ‘디렉토리’ 매거진은 ‘주거’ 관점으로 1·2인 가구의 라이프스타일을 기록한다고 정체성을 밝히고 있다. 디렉토리 최혜진 편집장은 “집을 구하는 것 자체가 도전인 밀레니얼 세대에게는 이미 집의 의미가 달라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시장은 ‘온라인 집들이’ 등 집을 어떻게 소유하고 꾸밀지에만 집중하고 있다”며 “집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한 우리 사회에서 주어진 한계 상황에서 내 공간을 편안하게 꾸미고 싶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 잡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의 공간에 깃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물론 세 들어 사는 집의 보증금과 월세를 공개한다. 세입자의 불안감도 굳이 포장하지 않는다.

최 편집장은 “바깥에서는 별 볼 일 없는 비정규직 청년이지만, 집에 돌아오는 순간 오롯이 나다운 공간을 만끽하며 위로받고 싶다”는 얘기를 남긴 인터뷰이가 인상적이었다고 전했다. 투자의 대상이 아닌 누리는 공간, 요즘 집순이·집돌이에게 집은 그런 곳이다.

장회정 기자 longcut@kyunghyang.com